노부모가 차리는 제사상, 기력을 잃어가는 관성
유세차
어린 시절 제사 때마다 듣던 축문 읽는 소리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킥킥대다 할아버지께 한소리 들을 때부터 지금까지, 또 다른 마법처럼 잊히지 않는 주문들.
조율이시,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뭐 이리 복잡한가 하면서도 제사에 완고하신 할아버지 덕에, 때마다 치러지는 제사상차림은 큰 변동이 없었다. 또 누가 나서서 쉬이 바꾸기 힘든 관습과 관성 덕에 세끼 밥상 외에도, 그 많은 상을 차리느라 엄니는 일 년 내내 분주했다.
남의 집에 시집와 얼굴도 모르는 조상 대접하랴, 시부모에 자식들 세끼 밥상 차리느라 아플 새도 없던 엄니는 이제 좀 느슨해져도 될 때가 오자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동안 표현 못한 미안함이 컸었는지 주방 출입이 부쩍 늘던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집안일 전담 처리반이 되어있다. 그 와중에도 엄마 말 안 듣고 고무장갑을 안 끼다가 주부습진으로 고생 중.
조상들 봉사에 정성이던 할아버지는, 이제는 제사상을 받으러 오신 지 벌써 십수 년이 넘었다.
날 궂으면 오지 말라고, 김치 떨어졌으면 가져가라고 자식이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저래 엄니는 걱정뿐이다. 얼마 전 넘어져 불편한 다리로 꾸역꾸역 제사상 차릴게 뻔히 보여 손이라도 보태려 내려갔다.
효자 0 0
집에 들어서니 전 부치는 냄새가 한가득이다.
많이도 했네~. 이거는 해야지.
저것도 올리나~. 파운드케이크 할아버지 잘 드셨잖냐.
잔은 하나만 올리나~. 두 개 올려야지.
오랜 시간을 봐왔으니 대충 알면서도 제사장들의 지휘권 고양을 위해 모르는 척 자꾸 묻는다.
유세차~~~ 상향. 아버지가 읽던 축문은 형의 몫이 되었고 이후 저 역할이 조카 녀석한테 이어져 계속될는지는 모를 일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생각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모들의 출입도 뜸해지고, 형이 결혼 후 출가를 하고, 나도 객지 생활을 하며 집안의 인구 밀도가 낮아진 후로 차례상, 제사상차림이 전보다는 간소해졌다.
그래도 엄니 아버지의 평생에 당연지사로 회전하던 관성은, 쉬이 멈출 수가 없나 보다.
조금만 차려요~. 그냥 사다하지~. 머리가 커진 자식들이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이젠 힘들어서 그래야겠다 하면서도 상이 차려지면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결국 할 건 다 한다.
기억과 마음에 걸려 쉬이 놓지 못하는, 어느새 많이 늙어버린 부모의 관성.
상향
언젠가부턴 아무도, 엄니 힘든데 조금만 하란 말을 않는다.
예전의 뻑뻑한 의무감이 아닌 노부부의 느슨해진 일상의 소일거리이자, 흩어졌던 가족들이 함께하는 한 끼 만찬의 의미가 더 큰 생의 위안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게다.
조율이시면 어떻고 시율조이면 어떠하랴. 홍동백서면 어떻고 홍서백동이면 뭐가 문제겠나.
제사상에 평소 좋아하시던 짜장면이 올라가도, 즐겨드시던 맥주가 올라가도 아무 상관없을 것이다.
깜빡하고 평소와 다르게 순서가 놓여도 이젠 아버지도 굳이 뭐라 안 하신다.
엄니의 훌륭한 요리 솜씨 덕에 오랜 세월 푸짐한 제사상 받아 잡수셨고, 할아버지 못지않은 아버지의 정성도 향불 건너로도 다 아실 테니, 조상들도 가타부타 트집 잡을 일도 아닐 것이다.
지난번 다리를 다친 엄니는 이제 절을 올리고 잘 일어서지도 못한다. 언제까지 노부모의 제사상 차리기, 예전 같지 않은 기력의 관성이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힘들어 물 한 대접만 올리더라도,
엄니 아버지의 제사상 차리기를, 오래 봤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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