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슈만의 정신병과 클라라 슈만의 헌신, 클라라를 연모한 브람스의 헌신

by 난파선장 2023. 10. 23.
반응형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의 관계는 음악적 교감과 협력, 깊은 개인적 유대, 중요한 역사적 맥락으로 가득 찬 매혹적이고 복잡한 관계입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시대,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와 연민, 헌신으로 이어졌던 뛰어난 음악가 세 사람의 흔적을 살펴봅니다.

독일_화폐_속의_클라라_슈만
독일화폐 속의 클라라 슈만, 도이치 방크, 1996

Deutsche Bundesbank,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슈만의 정신병과 클라라의 헌신, 클라라 슈만을 연모한 브람스의 헌신


    1. 로베르트 슈만 (1810~1856)
    Robert Schumann, 독일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평론가. 낭만주의 음악 시대의 중요 인물로 피아노와 가곡 작품으로 유명하다. 1840년 클라라 비크와 결혼했고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다 4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2. 클라라 슈만 (1819~1896)Clara Schumann
    Clara Schumann,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며 1840년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했다. 슈만의 사후에도 활발한 연주활동을 이어나갔고 브람스와 정신적인 교류를 지속했다.

    3. 요하네스 브람스 (1833~1897)
    Johannes Brahms,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낭만주의시대에 고전파 음악의 전통을 지키며 독자적인 작풍을 견지했다. 1853년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부부를 만나 평생에 걸친 교류를 가졌다.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비크(클라라 슈만)


    만남의 시작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과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던 슈만은 아버지의 사망 후 어머니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1830년 음악에 대한 열망에 유명 피아노 교사인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 신동인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클라라 슈만이다.

    슈만은 1834년 귀족의 딸 에르네스틴 폰 프리켄과 약혼을 했지만 그녀가 사생아로서 경제적 후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헤어지게 된다.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리고 15세가 된 피아노 스승의 딸 클라라 비크와의 관계가 깊어지며 스승인 프리드리히 비크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손가락 장애로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고 작곡과 음악 비평에 열중하던 슈만은 1837년 18세이던 클라라에게 청혼을 한다. 클라라 비크는 이미 9세에 피아니스트로 공식 데뷔를 한 신동이었고, 12세에 유럽 공연을 돌며 니콜로 파가니니에게 협연 요청을 받을 만큼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법정 다툼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피아노 스승인 프리드리히 비크는 장래가 유망한 천재 피아니스트인 딸과 미래가 불투명한 작곡가 슈만의 결혼에 말 그대로 결사반대. 슈만은 미성년자인 클라라가 아버지의 동의 없이 결혼을 허가해 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프리드리히는 그들이 결혼을 하면 클라라의 공연수입의 권리와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등의 위협을 했고 슈만은 그를 고소했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슈만이 게으르고, 술에 취해 아내를 부양하지 못할 것이고, 음악도 형편없다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결혼에 반대했지만 결국 법원은 1840년 결혼을 허가했다.

    하지만 오랜 법정 공방을 거친 힘겨운 결혼임에도 이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히진 않았다. 그들 사이엔 8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4명이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슈만도 젊은 시절부터 이어온 문란한 사생활을 멈추지 않았고 양극성 장애로 인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다 결국 일찍 사망했다.

    클라라 슈만이 된 클라라 비크


    피아노 신동과 명성

    클라라 슈만은 피아노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두각을 나타냈고 9살 때 공식적인 피아노 연주회로 데뷔했다. 11세부터 유럽을 순회하며 가진 공연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결혼 당시 이미 음악계에서 슈만보다 유명한 인물이었다.

    1844년 촉망받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을 만나 협연을 하게 되었고, 요하임과의 인연은 평생을 두고 240여 회의 협연 공연으로 이어졌다. 1853년 요하임의 소개로 알게 된 브람스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인연으로 교류하며 연주회에서 브람스의 곡을 자주 연주했다.

    연주와 음악적 성향

    클라라는 11세부터 매년 작곡을 하였지만 결혼 후 차츰 작곡은 줄어들었고, 남편의 사망 후 연주 공연은 활발해졌다. 평생 1300여 회가 넘는 연주회를 펼쳤고 절반 정도는 협연이었다. 남편 슈만의 곡과 브람스의 곡을 널리 알렸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연주는 대표적인 레퍼토리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악보 없이 암보로 연주를 했는데 당시에는 흔치 않은 모습으로 그녀의 재능을 나타냈다. 또한 작곡자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는 절제된 연주를 선보였던 클라라는 화려한 연주의 리스트나 급진적인 바그너의 음악을 비판했다.

    브람스, 요하임 등과 함께 음악적 보수지향의 그룹을 만들어 리스트나 바그너 등의 급진적인 음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후에 이어지는 바그너와 브람스의 관계, 바그너 지지파와 브람스 지지파의 대립은 음악계에서 요란하고 유명했다.

    클라라_슈만_로베르트_슈만_일러스트
    클라라 슈먼과 로베르트 슈만, 일러스트, 1906

    book editors: John Knowles Paine; Theodore Thomas; Karl Klaus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슈만의 정신질환과 사망


    1825년 누나 에밀리의 자살, 1833년 콜레라의 대유행으로 인한 형과 형수의 사망, 결혼 후에는 아내 클라라에 대한 음악적 열등감에 우울증에 시달렸다. 첫째 아들이 태어난 다음 해에 사망하기도 했고 결국 슈만은 지속적인 환청과 환영, 시력 장애 속에서 고통받았다.

    1854년 슈만은 라인강에 몸을 던졌고 지나가는 배에 의해 구조되어 보호시설에 들어갔고 1856년 7월 4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일부 학자들은 슈만의 활발한 작곡활동과 우울증세로 인한 침체기를 오고 가는 양극성 장애 증상, 손가락 마비, 시력 장애들이 수은 중독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있다. 슈만의 문란한 사생활에서 매독에 걸렸을 가능성이 크고, 19세기 일반적이었던 수은 치료의 중독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이 슈만의 경우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검 보고서에서 발견되는 뇌의 종양, 뇌수막증 등 신경학적 장애에 기인한 사망설도 제기된다.

    반응형

     

    로베르트 슈만과 요하네스 브람스


    브람스의 멘토, 슈만 부부

    요하네스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과 협연으로 친분을 이어가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의 소개로 20세이던 1853년 슈만 부부를 처음 만났다. 브람스 작곡의 연주를 들은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재능과 잠재력을 알아채고, 슈만이 창립자였던 음악 저널 'Die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새로운 길'이라는 기사로 젊은 작곡가 브람스를 음악의 미래로 칭송하며 널리 알렸다.

    슈만은 또한 출판사와 다른 작곡가들을 포함한 음악계의 중요한 인물들에게 브람스를 소개했고 이러한 슈만의 지원은 브람스가 그의 작품을 출판하고 공연할 수 있는 초기 경력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술적 영향과 교류

    슈만의 낭만주의적 이상과 음악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은 브람스의 초기 작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브람스는 복잡한 대위법과 구조의 전개 같은 슈만의 양식적인 요소들 중 일부를 채택했고 그런 영향은 브람스의 초기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브람스는 슈만, 디트리히와 함께 요하임을 위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나타 <F-A-E소나타>에 공동으로 작곡에 참여하기도 했고, 슈만의 사망 후에도 클라라 슈만과 자녀들을 후원하고 로베르트 슈만의 곡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클라라 슈만과 요하네스 브람스


    인연의 시작

    클라라 슈만과 요하네스 브람스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낭만적이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들로 보아 깊은 우정과 상호 존경의 유대를 나눴다는 것은 분명하다.

    1853년 요제프 요하임의 소개로 슈만의 집으로 브람스는 슈만 부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는 후원을 얻었다. 1854년 로베르트 슈만이 라인 강에 투신하며 슈만과의 교류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브람스가 슈만에게 받은 음악적 영향은 컸고, 클라라 슈만에게서 받은 영향 또한 평생을 두고 지속되었다.

    슈만이 자살 시도 후 요양원에 있던 시기, 정신적 안정을 위해 요양원에서는 가족의 면회를 금지시켰고 브람스가 요양원을 오가며 슈만의 안부를 전하고 슈만의 가족들을 돌봤다.

    슈만 사망 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클라라는 활발한 연주회를 가졌고, 공연 레퍼토리에는 남편 슈만과 브람스의 곡들이 자주 포함되었다. 브람스 또한 <슈만의 주제에 관한 변주곡, 작품 9>를 작곡 클라라에게 헌정했고, 진보적 음악에 대한 비평에 클라라와 뜻을 같이 했다.

    평생으로 이어진 교류

    브람스는 슈만 부부를 만났던 20대 초 젊은 시절부터 클라라 슈만과 편지 교류를 가졌고, 편지에는 슈만 부부에 대한 존경과 찬사, 음악에 대한 견해와 조언, 클라라에 대한 그리움과 연모, 브람스에 대한 강한 유대감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1856

    "당신은 내게 무한히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소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루 종일 당신을 사랑하는 이름으로 부르고 당신을 칭송하며 보내고 싶습니다."


    클라라 슈만이 브람스에게, 1857

    "나는 항상 당신을 이해하고 음악가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당신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라라 슈만이 브람스에게, 1874

    "당신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제 인생의 말년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경험입니다, 더 소식을 전해 주세요."

    클라라 슈만은 1896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브람스는 1897년 64세로 사망했다.


    ▶ 생의 불꽃을 피우다 단명, 요절한 유명인들, 미술 클래식음악 분야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