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
- 이상(李箱, 김해경), 1910~1937
자화상, 툴루즈 로트렉, via wikiart.org
- 툴루즈 로트렉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 1864~1901
20대에 폐병의 각혈과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유전적 질병에 의한 다리 부상으로, 심연의 언어를 글로 그림으로 토해내다 스러져간 이상과 툴루즈 로트렉.
그들의 속절없는 꿈결 뒤로, 빛나는 예술은 꿈에서 깨어 남아있다.
이상(李箱)과 금홍, 로트렉과 발라동의 속절없는 꿈결
로트렉을 보다
툴루즈 로트렉을 처음 만난 건 오래전 도쿄의 대형서점.
HR. 기거와 에곤 실레 등, 건축 서적보다 강렬한 인상의 그림들에 정신이 팔려 미술 코너를 뒹굴다,
TASCHEN? 타쉔? 타스첸? 뭐라 읽는지도 모를 출판사의 '화보집'을 통해서였다.
분방하지만 힘 있는 선들.
형형하지만 우울함이 덕지덕지 매달린듯한 색채들.
누군들 아니겠냐만 이 양반 또한 사연 많은 양반이겠거니~
돌아오는 길 어깨에 걸린 가방 안에는 사러 간다던 루이스 바라간과 타다오 안도의 건축 책 대신, 처음 만난 이들의 미술 화보집만 가득했다.
그렇게 돌아와 그에 대해 여기저기 훑다 보니
둥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이상(李箱) 김해경.
이상(李箱)과 금홍(錦紅)
"스물세 살이요― ---삼월이요― ---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新開地)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한등(寒燈) 아래 밤이면 나는 늘 억울해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이 나는 여관 주인영감을 앞장세워 밤에 장고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금홍(錦紅)이다."
<봉별기>, 1936, 이상(李箱) /공유마당, 한국저작권위원회
로트랙과 수잔 발라동
신체적 콤플렉스에 대한 세속의 조롱과 부친의 외면으로 상처 난 귀족 가문의 외아들은(로트렉의 남동생은 태어난 다음 해에 사망했다), 집을 나와 몽마르트에서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다.
몽마르트 시절 에밀 베르나르, 빈센트 반 고흐 등과 친분을 쌓기도 한 그는 1889년 문을 연 카바레 물랭루즈를 드나들며 물랭루즈의 포스터, 카바레의 댄서들, 몸을 파는 여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의 열정을 쏟아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사생아 출신으로 가난에서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 야심 가득했던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을 만나 연인이 된 로트렉은, 화가로서의 그녀를 지지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애정을 비켜갔다.
자신의 가문과 반대 위치였던 하층민인 카바레 무희들과 몸을 파는 여인들에게서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을 술과 함께 희석시킨듯한 로트렉이었지만, 밑바닥에서 거슬러 오르려는 발라동과의 파국은 뼈에 새겨진 제도권의 서늘한 뒷모습과 허울에 대한 반발이고 세상 부질없음의 자조였을까.
"1885년, 툴루즈-로트렉은 수잔 발라동을 만났다. 그는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야망을 지원했다.
그들은 연인이었고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여겨진다.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발라동은 1888년 자살을 시도했다."
참조: Toulouse-Lautrec, wikipedia.org
Suzanne Valadon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상과 금홍, 로트렉과 발라동의 속절없는 꿈결
이십 대 초반, 스스로를 '박제된 천재'로 문학적 영감과 창작의 열정에 널뛰우던 청춘 이상(李箱)은,
폐병 각혈 후 마주한 거울 속에서 무엇을 보게 된 걸까.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사고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영원한 소년의 모습 로트렉은,
그림을 시작한 사춘기 시절 이미 덧칠된 캔버스와 뒤섞인 물감을 쥐게 된 걸까.
이상(李箱)은 가출을 일삼던 금홍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움켜쥔 정을 버리지 못했고,
로트렉은 수잔 발라동을 비켜나 물랭루즈와 홍등가를 드나들며 피안을 구했다.
느닷없이 덮쳐온 삐걱대는 생의 울타리 속에
시와 소설 그림으로, '파편이 된 에고'와 '그늘진 에로스'를 토해내던 더 이상 늙지 못한 두 청춘은
속절없는 꿈결같은 짧은 일생을 헤매이다가
이상(李箱)은 건강 악화로 27세에 동경에서 요절했고,
툴루즈 로트렉은 알콜중독과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37세에 그의 어머니 곁에서 생을 마쳤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생(生)에서의 영이별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
<봉별기>, 1936, 이상(李箱) /공유마당, 한국저작권위원회
Maurice Guibert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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