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고장난 녹음기 노이즈처럼 흘러나오는 색깔론이, 소련 공산당 가입을 이유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무지막지한 소식으로 들려오니 퍼뜩 노덕술과 매카시가 떠오른다.
친일 행위로 출세의 길을 걸었던 노덕술과 매카시즘 광풍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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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도 울고 갈 친일과 반공의 탄탄대로, 일제시대 고문왕 노덕술
일제시대 고문왕, 노덕술의 생애
노덕술 (1899~1968)
1899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출생. 일본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
울산공립보통학교 2년을 중퇴한 뒤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에서 근무하다 일본 홋카이도로 건너가 돈을 벌다 곧 귀국했다.
1920년 경남순사교습소 졸업.
1922년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
1924년 의령, 김해, 거창, 통영 등 각 경찰서의 사법주임
1928년 동래경찰서 재직 중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반일운동단체 관련자 등을 체포하여 고문
1928~1929년 반일투쟁 단체 혁조회 체포, 고문
* 혁조회는 동래고등보통학교와 부산 제2상업학교 학생 등이 조직한 독서회를 기반으로 부산과 동래 지역의 학생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반일투쟁조직이다.
노덕술은 1928년 일본을 다녀오던 양정욱을 체포하고 그의 일기장에서 혁조회명단을 찾아내 김규직, 최장학, 유진흥, 양정욱 등 7명의 간부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동래경찰서에 수감되어 노덕술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한 김규직이 옥사했고, 유진홍과 양정욱은 병으로 보석되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목숨을 잃었다.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강연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일본유학생들을 체포했고, 그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 등이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1932년 경부로 승진, 울산 경찰서 사법주임
1933년 인천경찰서 사법주임
1934년 양주경찰서 사법주임
1938년 개성경철서 사법주임
노덕술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937~1940년까지 200여 회가 넘는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섰고, 또한 일제 침략 정당화를 위한 여론 환기 및 선전활동과 친일 좌담회를 35회 주최해 일제로부터 1940년 4월 공로상을 받았고, 1941년 3월에 훈8등 서훈을 받았다.
1943년 경시로 승진,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경시는 현재의 총경급으로 1943년 당시 조선에는 2만 2728명의 경찰이 있었는데 조선인 경시는 단 8명뿐.
1944년 수송보안과장, 영화와 연극 등의 보급을 통한 사상 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흥행협회 이사, 자동차 수송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 이사 등의 이력으로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
노덕술, 해방 후 친일을 감추고 반공을 외치다
1945년 해방 후, 전국 경찰 경위 이상 간부가 80% 이상 일제 경찰 출신이던 시기
1945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1946년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
*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암살사건의 범인 한현우를 검거하자 이승만은 그를 반공투사라며 극구 치하.
1946년 조선공산당 정판사 사건
조선동산당원들이 정판사(인쇄소 이름)에서 위조지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다는 혐의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을 체포하여 고문.
이관술은 40년대 초 항일운동을 하다 이미 노덕술에 여러 번 체포되어 고문당한 적이 있었고 이번에도 노덕술은 고문을 통하여 자백을 받아냈지만, 이관술은 법정에서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었음을 밝혔으나 재판부는 종신형을 선고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국은 이관술을 처형했다.
1948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이 고문을 받다 사망하자 한강에 시신을 유기하고 박성근이 도주했다고 허위 발표, 6개월 뒤 박성근의 시신이 발견되고 여론이 악화되자 노덕술은 체포되었지만 장택상의 봐주기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1948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출범
- 노덕술과 일제 부역자들의 반민특위 무력화계획
반민특위 출범으로 궁지에 몰린 친일 부역자들이 반민특위 위원, 국회의원, 반민특위 특별검찰관, 반민특위 특별재판관 등 15명을 암살하고, 상황을 고려하여 검찰총장 권승렬도 제거하기로 모의.
재정 분야는 친일 재벌인 박흥식, 언론 분야는 친일경찰 출신이면서 극우 신문 ‘대동신문’의 사장인 이종형, 경찰 분야는 노덕술이 담당하고 실행자인 백민태에게는 권총과 수류탄 5발, 자금 17만 원을 지원.
암살 대상자들을 38선 인근까지 유인하여 사살하고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북하려는 것을 경찰이 저지하자 완강히 저항하다가 총격을 받고 죽었다.’라는 식으로 발표하고 사건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1949년 1월 24일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고, 1월 26일에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엄청난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반민법 위반, 수도경찰청 고문치사사건,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사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노덕술은 병을 핑계로 보석되어 병원에 누워있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이 총애하던 노덕술을 석방하라며 여러 차례 반민특위에 압력을 넣었다.
1949년 진보성향 국회의원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했다는 '국회 프락치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의 주도하에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했고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노덕술은 풀려나 복귀했다.
6.25 전쟁 후 군인으로 변신한 노덕술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군인으로 변신, 서울 수복당시 1사단 헌병대장
1952년 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족주의계열과 반 이승만 인사가 대거 당선되자 정권연장에 눈이 먼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납치해 국회의원들을 헌병사령부에 감금한 후 개헌을 강요하는 짓들을 별여 결국 정권연장에 성공했다.
이승만의 주도하에 특무대장 김창룡, 헌병사령관 원용덕, 그리고 헌병대장 노덕술이 관여했다.
1952년 부산 제2 육군범죄수사단 대장
1955년 서울 15 육군범죄수사단 대장 등 대공 업무에 몰두하여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1955년 대규모 미 군수물자 절취사건에 연루, 뇌물수뢰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월을 받고 파면.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상남도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
1965년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남
1968년 4월, 노덕술 69세의 나이로 사망
* 노덕술의 친일, 반민족행위 기록
2002년 발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포함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
노덕술의 친일, 반민족행위는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어 있다.
매카시즘과 공포정치
매카시즘(McCarthyism) 의미
1950~1954년 미국에서 일어난 극단적 반공주의 광풍으로, 당시 초강경 극우적인 정치 흐름을 주도했던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의 이름을 따서 매카시즘이라 불렀다.
현재는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또는 적절한 증거 없이 국가에 대한 불충성, 반역 등으로 매도하는 정치적 관행을 말한다.
날뛰는 공포정치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1908~1957)
1908년 위스콘신주 그랜드슈트 독실한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출생
1930년 마케트 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변호사를 거쳐 위스콘신주 역사상 최연소 순회판사가 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늦은 나이에도 미국 해병대에 자원입대.
1944년 위스콘신주 공화당 후보 예비 선거에 출마, 참패.
1946년 공화당 상원 후보 선거에 도전하여 상대 민주당 후보 하워드 J. 맥머리를 공산주의적 성향이 있다며 공격했고, 미국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압승하는 분위기 속에 매카시도 상원 의원에 당선.
38세의 나이에 매카시는 상원의 최연소 의원이었지만 재선이 다가오며 탈세와 윤리 위반으로 조사받을 위기에 처하며 자신을 추천할 지지기반이 없게 되자, 정치적 야심으로 가득 찬 매카시와 동료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강력한 반공주의 운동을 택할 것을 결심.
1950년 2월 9일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는 연설을 하였다. "국무부는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 국무부에서 일하고 정책을 만드는 공산당원 205명의 명단이 내 손에 들려있다."
매카시 연설 원고의 대부분은 강경 보수주의 성향의 한 신문 기자에 의하여 준비되었는데, 사실 원고에는 매카시가 말한 205명의 명단도 근거도 없었고 매카시의 머릿속에도 명단은 없었다. 근거 없는 정치선동이었다.
이후 매카시가 발표한 명단에는 205명이 57명으로 바뀌었고, 공산당원이라던 사람들은 국무부에 시험을 쳤지만 직원이 되지 못한 사람, 퇴직한 사람, 국무부 직원이지만 정책 수립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 등이 대부분.
상원 조사위원회가 매카시의 주장에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중국의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결과 공산당이 승리하였고, 소련의 핵무기 실험 성공, 한국전쟁 등이 일어나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는 커졌고, 이 상황에서 오랫동안의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려는 공화당은 반공주의 무기를 거세게 휘둘렀다.
매카시즘의 희생자와 매카시즘의 몰락
영화배우 겸 감독 찰리 채플린은 그의 몇몇 영화 내용과 발언 등으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추방되었고,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자폭탄 개발자 오펜하이머 등도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매카시는 애치슨이나 마샬 전 국무장관 같은 저명 정치인들에까지 공산주의 혐의를 씌웠다.
거칠 것 없는 매카시의 행태에 노동자 계급, 가톨릭교도들, 소수민족, 보수적 공화당원들은 지지를 보냈지만, 유명인사들이 하루아침에 청문회에 불려 나와 '빨갱이'로 마녀사냥 당하며 공격받는 걸 지켜본 미국 국민들은 의심과 불안, 혼란 속의 나날이었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막무가내식으로 몰아가던 매카시즘은 매카시의 폭로가 억지임이 점차 드러나고 민주당 정부를 공격하던 호재로 매카시즘을 이용하던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후 오히려 부담을 느끼며 점차 누그러졌다. 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역시 전우들이 매카시에 공격당하는 걸 못마땅해했다.
1954년 약 2천만 명의 시청자가 보는 '육군에 대한 매카시 청문회' 생중계에서 터질 것이 터졌다.
매카시는 거만하고 위협적인 태도로 육군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우글거린다는 증거도 없는 주장을 펼치며 육군 법률 대리인 조셉 웰치에게 "공산주의자를 걱정한다면 진보성향 변호사 협회인 '전국 변호사 조합'에 한때 몸담았던 당신 사무실의 프레드 피셔라는 사람을 확인하라"고 공격했다.
육군 법률 대리인 조셉 웰치는 "지금까지 의원님, 저는 의원님의 잔인함이나 무모함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를 더 이상 죽이려 하지 맙시다, 상원의원님. 그만하면 충분히 했습니다. 더 이상 예의가 없으신가요, 의원님. 예의가 남아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고 청문회장엔 박수가 터졌다.
이 청문회를 계기로 매카시에 대한 대중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1954년 9월, 상원위원회 보고서는 만장일치로 매카시의 행위를 "변명의 여지가 없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규정했다.
1954년 12월, 상원에서 67대 22로 매커시의 지난 행위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매카시는 상원 의원직은 유지하였지만 동료 의원들은 그를 피했고 외부 연설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를 따라다녔던 언론도 외면했다. 알콜과 몰핀 중독이라는 얘기가 들려왔고 1957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노덕술과 매카시, 홍범도와 박정희
노덕술과 매카시
노덕술(1899~1968)과 매카시(1908~1957)는 비슷한 시기를 살다갔지만 그들의 삶은 비슷한 듯 달라 보인다.
노덕술은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을 침략한 일본에 맞서 싸우는 같은 민족을 색출하고 죽음에 이르는 고문을 일삼으며 친일의 선봉에 섰고, 8.15 광복과 6.25 전쟁 후에는 반공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노덕술은 이해관계가 맞는 권력의 비호아래 죽기전까지 탄탄대로의 출세길을 걸었다.
매카시는 그나마 전쟁 중 자원 입대하는 등 조국에 대한 봉사를 보였으나 정치적 야욕에 눈이 멀어 타인의 인생을 짓밟는 무지한 과오를 저질렀다. 짧은 기간 권력의 맛에 날뛰었지만 세상의 상식과 순리는 그를 제자리로 밀어냈다. 누군가 그의 매카시즘에 몇몇의 성과가 있다 한들, 더 엄청난 과오를 가려주진 못한다.
근거 없는 비난, 마녀사냥, 블랙리스트, 적법한 절차의 결여, 국민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반대에 대한 탄압, 공포 정치 등등...
노덕술과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젓고 간 시대의 키워드들과 2023년 현재의 모습이 큰 차이가 없다.
생활의 불편과 먹고 삶의 위협과 공포 속에서도 상식과 이성의 힘이 버텨내지 못한다면 제2의 노덕술과 매카시는 언제든 튀어나온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짐승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홍범도와 박정희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하려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1920년대 가입했던 소련 공산당 이력이 문제란다. 그 시절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군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건 1943년이다.
1950년에 일어난 북한 공산당의 남침과 관련도 없고 당시 미국과 소련은 연합군이었다. 홍범도 장군이 북한 같은 공산주의 활동을 하려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게 아니란 건 역사책을 읽을 줄 아는 초딩도 이해할 일이다.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고 맥락없이 달랑 공산당 가입 이력이 문제라는 논리라면,
-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고,
- 일본 육사를 졸업했고,
-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 관동군에 입대했고,
- 해방 후엔 좌익 활동을 주도하다 경찰 총에 사망한 형(박상희)도 두었고,
-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 가입했고,
- 남로당 가입이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 남로당 명단을 넘겨 주며 감형을 받았던,
위와 같은 화려한 이력의 박정희는 자칭 애국 보수 우파들이라면 당연히 내다 버려야 할 대상 아니던가.
이러다가 반공운동에 앞장섰다며 노덕술의 동상도 등장할 기세다.
정신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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